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임유청: 관객, 예술가, 통과하는 풍류.

*단락별 소제목은 전부 parkminhee.com의 게시판에 업로드 된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괄호 안은 작성자 명과 게시일입니다.

“모든 감각을 수평적으로 느낀다는 것은 도래하지 못할 미래를 상상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우. 2023년 11월 11일)

관객이고 소비자인 나는 내가 ‘발견한 이미지’를 내가 위치한 자리에서-내 시점으로-나만의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시키고 소장하는 행위가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그것은 간편하고 선명하다. 오독도 몰이해도 탄로 날 걱정 없고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글자로 씌어지지 않은 소유의 기록, 결코 묵묵하지 않고 때론 시끄럽기까지 한 말 없는 기록들. 나는 디지털 이미지로 경험을 저장하고 소유하는 방식이 딱히 감상법의 퇴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소화해야 할, 혹은 소화하고 싶은 정보의 양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이 체득한 인기 있는 습관 정도로 여긴다. 의미 없는 이미지를 과잉 섭취한 것만 같은 체기와 다른 사람들이 섭취하는 만큼의 이미지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만 같은 조급증을 주기적으로 오가며 멀미하긴 하지만, 이 정도 부작용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의 소유가 곧 그 순간의 온전한 소유인 듯한 착각이다. 사진과 영상이 확실히 담보할 수 있는 건 ‘그 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 책장에 꽂혀 있다고 다 읽은 책인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리고 그 이치는 내 책상에 앉 아 고개만 들어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를 본 후로 이따금 박민희 작가의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게시판’을 읽기 위해서다. 거기에는 공연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올린 공연 날 이전의 글과 공연 날 이후 에 관객들이 올린 소감이 있다. 오랜만에 ‘이미지’ 없는 게시물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게시판이 이미지를 올릴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공연을 개인 디바이스로 기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게시판이라는 형태의 온라인 공간에서 한 편의 공연 곁을 유영하는 글자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글자로 쓰인 감상이 내 신체 중 카메라 역할을 맡은 기관을 통해 기록할 수 없었던 공연의 결과물 중 한 가지라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개인 계정’이라는 손쉽고 익숙한 접속처 이외의 곳, 그러니까 마치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공연장에 모여들 듯 이 게시판으로 찾아와 소감을 올리거나 지켜보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의 마음을 읽어 본다. 우리가 함께 처했던 암전을 떠올린다.

“관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같이 어둠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진실이” (아침. 2023년 11월 18일)

공연이 시작되고, 나는 조용히 경악했다. 이토록 깜깜한 어둠은 본 적이 없다. 눈을 감고 있을 때보다 어두웠다. 나는 조금은 절박한 심정으로 어둠 속에서 눈 둘 곳을 찾았다. 천장에 몇 개의 아주 작고 흐린 불빛이 있었다. 전구를 미세하게 흐르는 통제하지 못한 전류인 듯 의미 없어 보였지만, 나는 그것 들에 조금은 간절하게 시선을 매달아 두었다. 눈을 둘 곳이 없다는 느낌이 이토록 황망한 것일 줄은 몰랐다. 곧이어 사방에서 노래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사용하고 싶었다. 녹음되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인지, 실제 가수들이 객석 뒤쪽 모퉁이마다 서서 노래를 하고 있는 건 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생각보다 확고하고 정교해진 시각에 의존하는 습관, 음악조차 눈으로 확인하고 저장해야 기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관객으로서의 내 태도와 강박을 여기 차단된 빛 속에서 재빨리 돌이켜 봐야 했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어둠 속에서 재고한다. 노래가 이동한다. 귀를 기울인다. <영산회상>. 불교 음악. 석가와 그의 제자들, 보살들이 그려진 탱화를 떠올린다. 그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내가 그 그림을 기억한다고 할 수 있나?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진 찍힌 경험’들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간다. 조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던 공연장의 광경도 지나간다. 분명히 내 앞과 옆에 의자가 있었고,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채색의 바닥이 있었고, 현악기와 장단 연주자가 자리를 잡았고…… 관객들도 함께 사라졌다. 암전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왜 공연자뿐이리라 생각했을까? 사라진 관객들은 사라져서야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장한다. 그들은 나처럼 어둠 속에서, 나처럼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나처럼 없는 사람처럼, 나처럼 어둠이 되어, 모두를 어둠이란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둠이 되어, 한없이 동떨어졌고 무한히 연결된 채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나는 지금 내가 듣는 음악을 다른 이들도 듣고 있다는 사실만을 안다. 오직 그것만이 이 순 간의 유일한 절대적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 어떤 때보다 다른 관객들과 강렬한 유대감-일체감에 가까 운-을 느낀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몸을 볼 수 없을 때, 내 몸은 공기와 관계 맺는다.” (송민정. 2023년 11월 16일)

나는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내 손을 눈앞에 가져와 본다. 확인되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왼쪽 팔목을 감싸 쥔다. 내가 여기 있다. 나를 붙들고 나는 이곳에서 존재하는 가장 선명한 감각인 청각 을 따라나선다. 지금 들리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위협적이지 않고, 깊이 아름답다. 음악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띠고 있다. 음악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의탁하자, 그것과 내가 한없이 밀착되어 있음 을느낀다. 음악. 같고도 다른 말로 풍류. 풍류가 움직인다. 그러면 가만히 앉은 내가 바람이 없는 대기, 물이 없는 수면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음악이 목적한 곳이자 지나가는 길이다. 내게 닿는 것과 나를 통과하는 것이 모호해진 지금, 어둠이란 나의 바깥인 동시에 안쪽이다.

이곳의 모두가 마찬가지다. 연주를 하는 이가 음악가이고 춤을 추는 이는 무용가이고 감각을 기울이는 이는 관객이지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 서로가 보이지 않는 우리는, 어둠 속에서 풍류가 통과 하는 공동의 텅 빈 공간이 되기도 하고 음악이 도달하고자 하는 개별적 개체가 되기도 하며 동시에 공명한다. 우리의 신체는 무대가 해체되고, 예술가의 형체가 해체되고, 관객이라는 위치가 해체되어 악흥의 순간으로 만나는 공명의 배경이 된다. 그러한 경험은 그 자리의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거나 공연자와 관객이 어떤 위계도 없이 연결되었다거나 하는 낭만적이고 조금은 행복한 착각에 빠지고픈 유혹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관객은 다시 관객의 자리로 돌아온다. 어둠을 몸에 익히기 위해, 관객이 어둠 속에서 고꾸라지지 않고 그저 그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공연자들이 했을 수련을 가늠해 보곤, 그저 그날 함께 어둠에 섞여들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객석이 어둠이라는 형태의 영산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 그럼으로써 풍류, 또는 신들의 일부가 된 듯한 감흥을 느낀 것으로 족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렇다.

“수상소감 같지만 관객입니다”
(수상소감 같지만 관객입니다. 2023년 11월 11일)

다시 박민희의 게시판으로 돌아온다. 함께 어둠이었던 이들의 기록을 읽는다. 공연이 끝난 이제 우리는 모두가 이 기록의 독자이며, 게시판의 관객이다.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모니터 앞에 앉은 박민희 작가와 그의 동료 예술가들을 상상해 본다. 어쩌면 ‘신들이 모여든 산’이 작가의 입장에선 관객이 모여든 어딘가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공명해 줄, 예술을 지탱해 줄 동료로서의 관객이 있는 곳일 것이다. 예술가를 찾아가는 것이 관객의 일이듯, 관객을 찾아 나서는 것도 예술가의 일이다. 우리가 좋은 예술가를 찾고 싶어 하듯 예술가도 좋은 관객을 찾고 싶을 것이다. 박민희 작가의 <신들이 모여든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에서 어둠이란, 한 예술가가 ‘신들이 모여든 산’으로 찾아가는 여정 중에 발견한 도구인지도 모르겠다. 가는 길이 선명하지 않으니, 차라리 눈을 감고 걸어가 보자는 마음일런지도 모르겠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듯, 관객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관객이란 누구인가. 기억하는 이인가? 저장하고 소비하는 이인가? 작가를 응원하는 이인가? 작가의 토대인가? 예술의 팬인가? 예술의 동반자인가? 혹은 그냥 지나가는 이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작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가. 어둠 속에서 나는 무엇이 되길 바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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