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전지영: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관람기

전통음악에서 가곡과 풍류는 끊임없는 이미지 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중이다. 이 음악들은 선비들의 심신수양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이미지를 끊임없이 스토킹 하며, 이를 통해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비’와 ‘수양’이라는 음악 외적인 코드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고자 하는 사특한 욕망을 투사시킨다. 전공자들 스스로 이러한 욕망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가두며, 그럴 때 선비라는 철 지난 남성 가부장의 권위가 전면화 된 채 당대 음악예술을 통제하는 상황이 지속된다.
음악은 들림의 예술이 아니라 들음의 예술이다. 같은 음악이라도 그것을 듣는 사람의 심리적, 환경적 요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 한 음악이 누구에게는 눈물과 감동을 주지만 누구에게는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음악에는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만큼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의 태도와 심리가 중요하므로, ‘이 음악은 선비음악이니 훌륭하다’는 식의 편견 가득한 명제는 애초부터 거짓이다.
또한 음악은 선율과 리듬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청각을 통해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장의 사운드만이 아니라 무대에서의 퍼포먼스, 시각적 장치(조명만이 아니라 무대 세팅, 출연자 동선 등을 포괄), 주변 사람들의 언어와 호흡까지 모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음악회에서 청각적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오감을 극도로 민감하게 작동시키다. 선율과 리듬이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 같지만 귀는 그 자체로 신체의 대명사이며, 우리의 두뇌는 음악이 진행되는 내내 평소보다 훨씬 더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연주는 선율과 리듬만을 제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주자 스스로가 통과하고 있는 삶의 한 고비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일기장의 내밀한 페이지에 해당한다. ‘나는 연주자니까 악기만 탄다’는 것이 어리석은 착각이듯이, ‘관객들은 선율과 리듬을 듣는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착각이다.
그렇다면, 이 공연에서 제시된 몇 가지 모습들을 정리해보면, 조금 위험해 보일 수 있다. 일단 풍류와 수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부터 적절해보이지 않고, 모든 조명을 끈 채 소리만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음악을 청각적 예술로만 한정짓는 것으로 보여서 위태롭다. 어떤 조명도 없어서 연주자들의 동선이나 악기 연주자들의 음악적 흐름 역시 오직 훈련된 몸 감각만으로 이루어져야 하니, 호흡의 문제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기획자는 매우 영민해 보인다. 이러한 위험의 지적을 예견한 듯이, 풍류를 ‘형태가 아닌 상태’로 제시하고 노래를 몸속을 관통하는 바람으로 느낄 것을 주문하며, 바람 부는 공간(공연장)에서 바람 부는 신체를 통해 바람 부는 자아의 젖은 감각을 끌어내려 했다. 그 바람들 앞에 극도로 예민해진 몸의 감각이 환영(幻影)처럼 부풀어 오르며, 마침내 음악이 선율과 리듬의 굴레를 벗어나 바람 앞에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를 각인시키는 새로운 우주가 되어 블랙홀처럼 존재를 끌어당기는 영원의 시험장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공연이 끝나고 깨달았다. 내가 들은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울림이었고 내가 본 것은 광언기어(狂言綺語)의 상상력 가득한 공연이 아니라 삶의 어떤 실제상황이었다. 연주자의 호흡과 관객의 기침소리가 모두 입장권으로 획득되는 교환가치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이미 나의 바람 부는 두뇌활동의 바람소리였으며, 그런 면에서 표층 감각의 소진과 심층 감각의 돌출은 오직 ‘들음’의 ‘상태’(형태가 아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연장을 찾을 때 공연장 내부만을 생각하지만 공연장을 찾는 순간부터 끝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고 모두 공연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 공연장을 나선 순간의 저녁 찬 공기 역시 따지고 보면 공연의 일부에 해당한다. 풍류에 강제된 이데올로기적 거짓을 안고서도, 이처럼 바람을 호명하고 감각을 호출하여 존재를 ‘리셋’시키는 능력은 최근에 본적이 별로 없다. 찬 공기는 그러한 리셋을 확인하는 장치로서, 바람 부는 공연의 대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아티스트 박민희의 신작은 어쩌면 ‘당연하게’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 된다. 노래선율로 제시되는 영산회상이 청각적 부담으로 여겨진 이들도 있을 것이고, 가야금과 장구와 가객들의 연습과정을 걱정한 이들도 있을 것이며, 굳이 이러한 모습의 공연을 하려는 이유를 묻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관객들 스스로 답을 찾고 스스로 소화할 일이다. 공연의 답은 주최측이나 연주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며, 애초부터 답이 없기도 하다. 보는 이의 태도와 환경에 따라 ‘들음’은 달라지고 그에게 불어오는 ‘바람’도 달라진다.
노자가 말했다. 훌륭한 성취는 결함이 있는 듯하고(大成若缺), 훌륭하게 가득한 것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大盈若沖). 결함이 있거나 부족해보여야 더 채울 것이 있듯이 세상에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세상 모든 예술행위는 늘 새롭게 채워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마침내 ‘훌륭한 가득함’이 되는 것은 보는 이의 태도와 듣는 이의 들음에 달려있으며, 화려한 조명과 퍼포먼스가 아니라 암전에서만이 채워질 수 있는 예술행위는 이러한 노자의 언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노자가 말했다. 강과 바다로 모든 계곡의 물이 흘러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충분히 낮기 때문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현란함과 강렬함의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하여 이목을 모으고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없애버릴 때 충분히 낮아진 감각상태에서 사람들은 음악예술의 진면목에 다가설 수 있음을 이 공연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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