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신예슬: 혼잣말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의 마지막 공연에서 들은 바를 기록한다. 아래의 짧은 글은 깜깜한 공연장에서 써온 흐트러진 글씨들과 공연이 끝난 뒤에도 지속된 기억을 엮어 쓴 것이다.

시점이 멀어질수록 노래를 들은 기억은 조금씩 흐려진다. 동시에 어떤 것은 점점 선명해지는데, 그건 바로 그 공연이 ‘노래한다’라는 일에 아주 정확히 멈춰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목적어의 자리에 놓이지도 않고, 그 앞뒤에 다른 말들이 주렁주렁 매달리지 않는 아주 단순한 동사로서의 노래하기. 아마도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르기 위한 노래. 그들은 노래한다. 그는 춤춘다. 나를 포함한 그들은 듣는다. 그동안 ‘노래’를 정말로 들어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곰곰이 되돌아보며 세계에 떠도는 수많은 노래를 떠올려보자니 노래는 너무 높은 산이 되고 무거운 바다가 되고 너무 많은 얼굴들이 되어 금세 묻기를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지지만, ‘노래’에 대한 기억을 조금 더 샅샅이 뒤져본다. 노래에 ‘담긴 것’이나 노래가 ‘하는 일’처럼, 노래와 조금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한 순간들을 덜어내며 정말로 ‘노래’를 들었던 순간을 샅샅이 찾아본다. 언젠가 보았던, 자기충족적 기쁨을 위해 노래하는 것 같았던 눈을 감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노래는 암중에 불현듯 나타난다. 어둠은 소리를 멈추게 하는 속성이 있고, 그곳은 어두웠던 만큼 침묵도 두꺼워져 있었다. 천장의 별들, 아마도 조명기에 붙은 스티커들은 유일한 길잡이처럼 보였지만 특별히 기능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별자리는 그렇구나. 하고 노래를 들었다. 가끔 어둠 속에서 노래하지 않고 바닥을 더듬는 움직임도 지나갔다. 몸의 무게가 소리와 진동으로 전해져오는 순간들, 누군가의 손에 배어든 핸드크림의 향이 얼핏 스쳐 지나갈 때는 이들이 몸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한 점에 멈추어 서서 노래만을 들려줄 때는 노래가 몸에 귀속되지 않은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허공을 동동 떠다니는 노래를 들으며 세 사람의 목소리를 변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 목소리가 가진 특유의 습관과 특징들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목소리의 두께, 목소리의 떨림, 목소리의 주인이 목소리를 사용하는 방식, 그들이 동세와 소리 중 무엇에 더 신경쓰는지 등, 때론 목소리에 배어있는 은근한 중심점을 찾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몸을 가진 사람에게 귀속되는 목소리가 아니라 소리로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름에 귀속되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각별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들을 몸 안에 들여놓았다가 다시 내보내기를 반복한다. 때론 노래가 쉼 없이 움직이는 기류처럼 느껴진다. 사방에서 형성되는 큰 기류 안에서도 목소리들은 손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며 잔바람을 만든다. 꺾어내려갔다가 다시 꺾어올라가는 소리에는 위-아래의 움직임뿐 아니라 손바닥을 뒤집듯, 어떤 것을 반전하는 움직임이 있다. 직선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림을 키우며 곡선으로 변할 때는 성대가 얼마나 탄력적인 근육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높은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 납작해졌다가 동그래졌다가를 반복하는 목소리,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가 다시 언제 움직였냐는 듯 돌연 고요해지는 목소리, 돌처럼 단단한 목소리와 진자운동을 하듯 떠는 목소리. 노래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노래하는 몸과 춤추는 몸이 만드는 운동의 총량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문장을 아주 긴 호흡으로 노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말소리를 곱씹고 또 곱씹어 더 이상 말의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고아낸 것만 같은 소리들은, 더는 말의 표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흐트러진 자음과 모음들의 소리를 듣고 그것이 어떤 문장이었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문장에 담긴 의미는 재빠른 말의 속도로 전하기에는 너무 거대해서, 노래로 그 안의 동세를 충분히 풀어내고 더욱 길게 늘여야만 했던 것일까? 이 자음이 다음 자음으로 모음을 걸고 넘어가는 순간들, 말과 말 사이의 연음에서 태어나는 소리들, 소리로써는 또렷하지만 말로써는 전혀 명확치 않은 음절을 들으며 이 말들이 노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형태 변화를 거쳐왔을지를 떠올려본다. 그 문장으로부터 이 노래가 나왔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이 노래가 그 문장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마지막 지점이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역행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지나와 이제는 노래와 목소리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된 문장들이 노래를 태우고 있다.

어느 순간엔 똑바로 서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잠시 보았고, 그들은 다시 어둠으로 되돌아가 노래했다. 그렇게 천장의 별들과 먼 북소리, 움직이는 목소리들, 산산이 흩어진 채 노래 위에 고여있는 말들이 떠도는 그 공간에서 목소리와 노래만을 생각했다. 노래 말고는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는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듣는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들, 질문들뿐이다. 여기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무엇이 중요했을까. 어떤 순간에 기쁨을 누렸을까. 혹은 언제 어떤 단어가 어려운 구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돌파해냈을 때 어떤 짜릿함을 느꼈을까. 드러나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노래를 부르는 일은 어떤 몸의 반응을 이끌어냈을까.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듣는 이를 보지 않는 일은 얼마나 다른 일이었을까. 노래를 제대로 부른 적도, 아마도 제대로 들은 적도 없는 만큼 그것은 내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알 수 없을 감각이다.

어쩌면 마찬가지로 깜깜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끝 모를 질문을 마주하는 것이 아마도 듣는 사람에게 허락된 자기충족적 기쁨, 또는 풍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물음들에 대한 당장의 답을 구하기보다는, 풀리지 않는 상태로 오래 품으며 이들을 더 정교한 질문으로 서서히 바꿔보고 싶기 때문이다.

눈에 보인 것 없지만 남아있는 기억만큼은 선명하고 또렷하다. 정말로 노래를 듣고 있다는 감각. 별자리 같았던 빛들. 손바닥을 휙 뒤집듯이 아래로 떨어져 천장을 바라보던 목소리들. 잠시 보였던 무정한 표정들. 탄식을 닮은 목소리들. 말과 말 사이에서 생겨난 노래만을 위한 음절들. 언젠가는 양손에 이것들을 쥐고 깜깜한 노래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고 싶다. 높디높은 산에서 그나마 헤맬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은 어딘가에서 불어온 미풍 덕이다.

글쓰기